소견에 좋은 대로

 
 
소견에 좋은 대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 25)
구약의 사사시대를 대표하는 코멘트 중에 가장 돋보이는 표현이 위의 본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를 총 갈무리하는 주제의 말씀으로 사사기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장식하고 있음입니다. 사사시대에 대한 전체적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 말씀만 보면 그게 칭찬인지 책망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거기에는 그마한 가치가 있습니다. 바른 이해에 도달하다 보면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현실을 덤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이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 전제의 말씀입니다. 그 당시까지 쭉 왕이 없었는데 그제야 왕이 없는 것이 이방과 비교 열외의 문제가 되었는지 의심이 드는 탓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왕으로 이스라엘에서 쭉 역사해 오셨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에덴동산이 내각제 통치 제도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왕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나 군림하지 않고 성도들에게 세상의 통치권을 위임하신 왕이고 성도들은 수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정치 형태로 비교한다면 내각제인 셈인데 일반적으로 내각제가 대통령 중심제 보다 안정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함에 자유의지를 주셨듯이 치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스스로 치리해 갈수 있기를 바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한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수상이 아니라 독재자 대통령이 된 듯이 행동을 했습니다. 스스로 왕으로 군림한 아비멜렉, 나실인의 정기를 저버리고 객기를 부리다 망가져 버린 삼손, 돈에 팔려 다니는 레위인 제사장, 사적으로 산당을 차린 미가, 등이 그들입니다.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신의 신분을 망각한 채 구약적 포스트 모던주의의 추구한 형국입니다. 사사시대에 소견에 좋은 대로가 책망이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마키야벨리식 군주론의 관점에서 보면 내각제든 대통령제든 독재이든 정치만 잘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준행하는 이스라엘에서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대악이요 대죄에 속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우선의 정치란 약자와 이방인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정신이 거룩함에 이르는 사랑의 길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길에 자기 소견을 우선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소견에 좋은 대로를 개인의 관계에서 이해하면 개인관계의 단절과 불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자기의 이익과 편리를 도모하여 상대방이나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는 귀를 닫는 태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현대를 불통의 시대를 넘어 먹통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도 자기 소견의 옳음을 주장하는데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나의 소견의 옳음을 앞세우기 전에 남의 소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이 믿음의 역량이란 의미입니다. 그것을 확대한 것이 신정 정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