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하는 자
고리 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시편109:11)
대금하는 자란 오늘날로 치면 대부업에 종사하는 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작게는 사채놀이를 하는 자에서부터 크게는 금융업 전체를 일컫는 말입니다. 필자가 대금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작금에 사회 문제가 되는 사채업자의 횡포 때문이나 대금업자를 영어로 Creditor라고 좋게 인식해서도 아닙니다. 성경에 대금업에 관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의 선악을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에서 이자를 받는 것을 엄금했는데 예수님은 이자를 받는 것을 옹호한 듯한(마25:27) 발언이 글을 쓰도록 특별히 자극했습니다.
대금업과 관계에서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전당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자 혹은 이식이란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 등장한 고리도 그에 해당하는 단어 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도들이 크게 관심을 갖는 꾸어줌 혹은 꾸임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 단어의 특징은 구약의 율법에 나오는 단어들이지 신약에 는 거의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의 영향으로 대금업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는데 그 이유가 연구할 대상이란 생각입니다.
시내산 율법에서부터 이자를 받을 목적으로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주는 것을 엄금했습니다. 그 율법은 물물 교환시대에서부터 화폐가 유통된 신약에 이르러서도 잘 준행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경우는 안 그랬을 테지만 외형상 신앙의 세계에서는 로마시대의 교황권이 확립된 시대에도 대금업 금지는 신앙의 소중한 덕목이었습니다. 그 전통이 종교개혁 시대 이후 상공업의 발달로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상주의 도시들과 나라들이 번창하면서 부의 편중이 일어났고 상업에 대금업의 필요성이 제기된 탓입니다.
대금업이 성행하면서 문제가 된 것은 당시의 권력을 쥐고 있는 교황청이 이자를 받은 대금업을 불법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여러 나라에서 대부업의 허가를 청원했으나 로마 교황청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대금업을 허가하는 것은 당시에 제기됐던 지동설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됐습니다. 이해 당사자 간의 첨예한 대립과 불복종 문제가 발생했지만 해결될 기미는 없었습니다. 그런 탓에 대금업은 겉으론 불법이지만 속으론 허가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공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혼란스런 과도기적 상황 가운데 이 문제를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 세속의 업에 종사하는 중에서 나선 자들이 있었지만 카톨릭 주교 중에도 대금업을 인정을 주창한 자가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 톨레도의 부단한 노력과 그를 옹호하는 신학자들이 생겨나면서 교황청의 태도는 종당에 바뀌었습니다. 그 과정은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며 겪었던 고난에 비결될 만한 면이 많습니다. 저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금업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대금업 금지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코미디에 불과할 정도로 유치한 것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해 당사자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교권의 위기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성경 해석의 틀을 바꾸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발전과 사회제도의 복잡화로 기존의 가치관이 도전을 받게 되었을 때에 저들은 투철한 고민을 했다는 증거인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일을 위해 앞장선 자들과 최후로 승인한 권력자들에게도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변화를 세계사적인 입장에서는 세계관의 전환기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신앙과 일반 세계에서 다 같이 진통의 과정을 겪기 마련입니다. 당시에 문제가 됐던 성경을 소유하는 것이나 노예의 해방을 인정한 경우가 좋은 예에 속합니다. 그런 변화의 모색은 처음에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습니다. 지난한 갈등과 대가를 지불하는 과정을 거쳐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이유가 권력자의 기득권 수호 때문이 아니라 안전성을 희구하는 인간의 보수성 때문이라고 간주합니다.
국가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전환의 시점에서 수구와 개혁의 마인드가 대립하여 혼란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성취는 한쪽을 타도하거나 부정하는 식으로 이루l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나 사회 운동과 기독교 운동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선진들이나 기독교사의 이견자들은 기존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주장을 옹글게 펼친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자에 대한 말씀도 대금업의 미래를 예건하고 한 개혁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