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844 추천 수 0 2014.03.04 19: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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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스트로치의 ‘성 토마스의 의심’ 1620년경, 캔버스 위에 유화, 89 x 98.2cm, 영국 피터 무어 재단
 
권용준 안토니오(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베르나르도 스트로치(Bernardo Strozzi, 1581-1644년)가 그린 ‘성 토마스의 의심’은 예수의 부활을 심도있게 다루면서도, 자전적인 의미를 지니는 교회미술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르나르도 스트로치는 제노바 출신의 화가로, 17세기 북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바로크 예술가이다. 일찍이 카라바조나 루벤스 등의 영향으로 온화하면서도 화사한 색감을 구사하였다. 특히 형태면에서는 엄격한 종교적 이념보다는 종교성을 세속적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였는데, 이런 형태가 화사한 색감과 만나면서 관능적이며 속된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당시 보수적인 교회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화풍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스트로치는 17세의 나이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수도자가 되었는데, 당시 작은 형제회의 엄격한 쇄신을 요구하던 수도회는 실제 그의 화풍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회는 그에게 교회의 규범에 맞는 예술을 강요했으나, 스트로치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그를 감옥에 가두고 만다. 그는 이런 종교와 표현상의 갈등을 피하려고 제노바를 떠나 베네치아로 향했으며, 그곳의 자유로운 숨결과 더불어 새로운 화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곳에서 유명한 작곡가인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초상화를 주문받으면서 그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극한 시련 끝에 화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가 그린 ‘성 토마스의 의심’은 제노바의 수도원 시절에 그린 것으로, 엄격한 교회의 규범 속에서 그가 어떤 예술의 길을 걸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주제로 한 그림 가운데에는 죽음을 이긴 승리자이자 절대자로서 영웅적 기상을 그린 그림이 많다. 그야말로 인간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극복한 신적 존재로서의 위상이다. 그러나 스트로치의 그림은 좀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의 그림 속 예수님한테서는 그런 영광스러운 이미지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에게 부활을 확인시키는 따스한 심성의 평범한 젊은이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화풍이 당시 교회의 반감을 샀을지 모르지만, 실상 화가의 의도는 그런 형식적이며 가시적인 차원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승리와 영광의 현시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의심과 의혹에 가려진 신앙의 눈을 거듭 뜨도록 권유하는 깊은 종교적 차원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요한 복음 20장 24-29절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한 토마스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했다. 이 말에 예수께서는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셨던 것이다. 스트로치가 그린 이 그림은 바로 이 순간, 곧 예수님 부활에 대해 의심을 품은 토마스에게 예수께서는 손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토마스가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직접 넣어보도록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 이 그림에는 죽음을 이긴 승리자의 영웅적 기상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불신과 의혹에 사로잡힌 자가 올바른 선택의 길을 걷도록 모든 것을 베풀어주는 따스한 인성의 필부가 그려졌을 뿐이다. 물론 이 성경 이야기는 신앙에 대해 모든 인간이 갖는 의심과 회의라는 나약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나약한 심성이 신앙의 확신이 들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 외침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시면서, 믿음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다. 그림을 보면 강한 의심을 품은 토마스가 자신의 상처에 손가락을 쉽게 넣을 수 있도록 팔을 벌린 예수님이 중간에 존재한다. 의심을 꾸짖는 예수님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인상에는 자애로우면서도 절대적 권위자로서 하느님이라는 이중적 모습이 역력하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토마스의 모습을 보자. 그는 돌아가신 주님에 대한 심적 회한과 방황 때문인지 머리와 수염은 단정하지 못하고, 옷도 다해지고 터져서 누더기에 가깝다. 비록 뒤쪽 3/4의 각도에서 포착한 토마스의 얼굴이지만, 예수님 상처에 손가락을 넣은 순간 주름 잡힌 이맛살에는 그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의심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그의 죄스럽고 공포에 싸인 오묘한 표정이 역력하다. 특히 예수님의 육신을 보면 고된 책형과 형극의 순간을 넘긴 처절한 모습이 아니다. 의연하고 단호한 표정의 얼굴에 서린 붉은 색은 신앙의 열정이자, 모든 이에게 나누어줄 사랑의 징표이다. 또한 너무도 순결한 흰색 피부 빛은 선배 거장 화가인 루벤스의 빛인바, 이 색을 통해 죽음을 이긴 신성의 경이로움과 천국의 아름다움을 대변하고 있다. 다만 덥수룩한 머리와 다듬지 못한 수염이 그간 그가 겪은 고통을 암시할 뿐이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주목할 것은 음영과 색채의 대비이다. 예수를 표현한 흰빛과 배경과 인물을 중심으로 서린 어둠의 빛은 선과 악이며, 천국과 이승이고, 믿음과 불신의 대비이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는 세 명의 인물이 의심과 놀람 속에 존재하는데, 이들은 딱히 토마스 사도가 아닌, 믿음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혹과 불신에 사로잡힌 우리 모두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림 속 예수는 다른 인물들보다 위에, 선하게 비치는 후광 속에 밝게 빛나는 존재로 계시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외쳐야 할 경배의 대상인 것이다. 실제 이 그림의 어둠은 예수님의 육신에서 발하는 밝음에 완전히 종속되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 어둠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특히 화가는 우리의 온 시선을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 곧 어둠을 지배하게 된 신성을 향하게 하고 있는 것이, 신앙에 따르는 고통의 길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예수님의 오른팔과 교차하는 토마스의 오른팔의 형태를 보면, 흰색과 어두운 색으로 이루어진 십자가 형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다스리는 분이시자, 악의세계까지도 포용하고자 아드님께 십자가의 고통을 주셨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암시적 십자가는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십자가이기에 신앙의 십자가이며, 예수님과 토마스의 두 팔이 만들어낸 십자가인 만큼 신성과 인성의 합이다. 그렇기에 이 십자가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만든 십자가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진정한 신앙의 힘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짐을 나타낸 것이며, 신앙 자체가 은총임을 보이고 있는 것 아닌가? 화가는 상처 난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담금질하도록 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이 그림에 묘사된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의심과 회의, 불신과 의혹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믿음의 힘을 얻은 토마스 신앙의 부활이 아닐까? 이런 믿음의 부활은 결국 시련과 역경 속에서 제노바에서 베네치아로 옮겨 새롭게 화가로서 정착하고, 자기의 믿음과 신념을 펼칠 수 있었던 화가 스트로치 자신의 부활과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그림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의심을 통한 믿음보다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무조건적인 믿음을 갖는 순수한 신앙인의 자세일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문학박사. 한국디지털대학교 교수. 미술비평가. 저서로 “명화로 읽는 서양미술사”(북하우스)와 “테마로 보는 서양미술”(살림)이 있다.
 
[경향잡지, 2009년 4월호] 
[원본 : http://images.artnet.com/WebServices/picture.aspx?date=19980709&catalog=9259&gallery=111548&lot=00073&filetyp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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